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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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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城)은 역사적으로 식량과 자원 축적에 따른 방어 필요성으로 등장한 건축물로, 9~10세기 유럽에서 카롤루스 제국 붕괴 후 봉건 제후들이 할거하면서 발전했다. 초기에는 토공과 목책으로 시작하여 석조 건축으로 발전했으며, 영주의 거주 공간이자 행정 중심지 역할을 했다. 11세기부터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모트 앤 베일리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12세기에는 돈전이 발달하고 석조 건축이 보편화되었다. 15세기 이후 화약 무기의 발달로 군사적 효용성은 감소했지만, 사회적, 문화적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한국의 성은 고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축조되었으며, 산성, 읍성, 왜성 등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성은 성벽, 해자, 성문, 망루, 천수각 등 다양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주의 행정 중심지, 사회적 과시의 장소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현대에는 관광 자원, 예술 작품의 소재 등으로 활용된다.

2. 역사

A keep seen from a river, rising behind a gate. The keep is large, square in plan, and has four corner towers, three square and one round, all topped by lead cupolas.
노르만 건축 양식의 런던탑 화이트 타워. 성의 다양한 기능(방어, 거주, 피난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성, 긴 길 끝에서 보이는 성은 석양에 의해 분홍색과 빨간색으로 켜져 있습니다. 성은 엄청난 크기를 암시하며, 인상적인 쌍둥이 탑의 문루와 왼쪽에 큰 둥근 요새가 있습니다.
영국의 윈저 성. 노르만 정복 시기 요새로 건립되어 현대까지 왕실 거주지로 사용되고 있다.


'캐슬(castle)'이라는 단어는 "요새화된 장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카스트룸'(castrum)의 지소사인 '카스텔룸'(castellum)에서 유래했다. 고대 영어 '캐스텔'(castel), 프랑스어 '샤토'(château), 스페인어 '카스티요'(castillo) 등 여러 유럽 언어의 관련 단어들도 여기서 파생되었다.[1] 이 단어는 1066년 노르만 정복 직전 잉글랜드에 처음 소개되어 당시 새로운 유형의 건축물을 지칭하게 되었다.[2]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성(城)의 정의는 "사유 재산의 요새화된 거주지"이다.[3] 이는 앵글로색슨의 부르나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와 같은 성벽 도시와 같은 초기 공동 방어 시설과 구별된다. 성은 공동 방어 시설과 달리, 지역 봉건 영주가 자신이나 군주를 위해 건설하고 소유한 사적인 요새였다.[4] 학계에서는 성을 주로 유럽에서 기원하여 십자군을 통해 중동 지역으로 전파된, 공통된 기원과 영향을 공유하는 특정 건축 개념으로 간주한다.[15] 세계 다른 지역의 유사 구조물, 예를 들어 일본의 ''시로''는 성과는 다른 역사적 배경과 발전 과정을 거쳤다.[16]

성은 군사적 방어, 행정 중심지, 영주의 거주 공간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6][67][11] 예를 들어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는 노르만 정복 이후 주요 거점에 성을 세워 점령지를 확보하고 지역 통치를 강화했다.[7][8]

성의 기원은 9세기 카롤링거 제국 붕괴 이후 지역 영주들의 사적 방어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초기에는 영주의 저택을 중심으로 토루, 해자, 모트 등을 축조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59][60][62][63] 이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유럽의 언덕 요새, 고대 로마의 ''카스트라''와 같은 더 이전 시대의 요새들과는 구분되는 중세 유럽의 특징적인 발전이었다.[53][54][57] 11세기 이후 유럽 전역으로 성 건설이 확산되었고, 초기 모트 앤 베일리 형태에서 점차 석조 건축과 돈존 중심으로 발전했다.[71][72][81] 12세기 후반부터는 십자군 전쟁 등의 영향을 받아 배치, 강화된 성문, 동심원 방어 구조 등 더욱 정교한 방어 설계가 나타났다.[89][92][100][101]

중세 말기에 화약을 사용하는 강력한 화포가 등장하면서 성의 군사적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9] 이에 따라 성은 방어 시설보다는 거주지로서의 기능과 영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10] 시간이 지나면서 성의 미학적 측면이 강조되었고, 결국 방어 기능이 약화된 성은 점차 고급 주택인 컨트리 하우스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12] 오늘날 많은 성들은 본래의 기능을 잃었지만, 역사적 유산이자 문화적 상징으로 남아 관광지나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성(Castle)'이라는 용어는 때때로 기술적인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메이든 성은 이름과 달리 철기 시대의 언덕 요새이다.[13] 또한 현대의 많은 저택들이 실제 요새 기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의 연관성이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에 '성'을 포함하기도 한다.[14]

2. 1. 기원 (9~10세기)

성은 카롤루스 제국이 붕괴하고 수많은 제후 영주들이 할거하기 시작한 9세기에서 10세기에 등장했다.[59] 이 시기 성의 출현 배경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마자르인, 무슬림, 바이킹의 침입에 대한 방어적 대응과 사적인 방어 필요성 증가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59] 카롤링거 제국의 붕괴는 중앙 정부의 약화와 권력의 사유화를 가져왔고, 지역 영주들이 경제와 사법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60]

그러나 9세기와 10세기에 성이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불안정과 요새 건설 사이의 연관성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일부 성들은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밀집되어 나타나기도 했으며, 반대로 국경 지역임에도 성이 적은 경우도 있었다.[61]

성은 영주의 저택을 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주의 집이나 홀은 주로 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에 화재에 매우 취약했다.[62]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고 외부 공격을 막기 위해 영주들은 집 주위에 토루를 쌓거나, 해자를 파고, 성벽을 세우는 등 다양한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특히 흙을 쌓아 언덕처럼 만든 모트 위에 건물을 짓는 것은 중세 시대에 나타난 독특한 방어 방식이었다.[63] 제방과 해자만으로 둘러싸인 단순한 방어 시설은 링워크라고 불리며, 모트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초기 형태의 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복잡한 구조로 발전하거나 석조 커튼월이 추가되어 강화되기도 했다.[64] 건물을 돌로 지어도 창문이나 나무 문을 통해 화재 위험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창문을 2층으로 높여 공격을 어렵게 만들고 출입구를 지상에서 2층으로 옮기는 등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는 현존하는 많은 성의 중앙 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65]

오른쪽


성은 단순히 방어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성에 주둔한 수비대는 주변 지역을 감시하고 통제했으며, 성은 영주가 법정을 열고 행정을 처리하는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66][67]

성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왕이나 다른 고위 권력자의 허가가 필요했다. 864년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은 자신의 허가 없이 ''카스텔라''(''castella'', 당시 요새를 통칭했을 가능성이 있음)를 짓는 것을 금지하고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로 여겨진다.[68]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군주가 영주에 대한 통제력이 약하거나, 오히려 영토 확보를 위해 새로운 성 건설을 장려했기 때문에 허가 절차가 형식적이거나 거의 없었다. 스위스는 국가적인 통제가 전혀 없었던 극단적인 예로, 그 결과 약 4,000개의 성이 지어졌다.[69]

9세기 중반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확실히 밝혀진 성은 거의 없다. 현재까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알려진 것은 프랑스의 두에-라-퐁텐 성으로, 950년경에 돈존(donjon)으로 개조되었다.[70]

2. 2. 발전 (11~15세기)

1000년 이후부터 헌장과 같은 문헌에서 성에 대한 언급이 크게 증가했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이 시기 유럽에서 성의 수가 갑작스럽게 증가한 증거로 해석해 왔다. 이는 도자기 조사를 통해 성터의 건설 시기를 추정하는 고고학적 조사로도 뒷받침된다.[71] 이탈리아에서는 950년대부터 성의 수가 50년마다 3~5배씩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 같은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성장의 속도가 더 느렸다. 950년 프로방스에는 12개의 성이 있었지만, 1000년에는 30개로 늘었고, 1030년에는 100개가 넘었다.[72] 스페인에서는 증가 속도가 느렸지만, 1020년대에는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 영토 사이의 분쟁 지역에서 성의 수가 특히 증가했다.[73]

유럽에서 성이 두드러지게 된 시기는 비슷했지만, 형태와 디자인은 지역마다 달랐다. 11세기 초, 목조 울타리와 탑이 있는 인공 언덕인 모트와 베일리는 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가장 흔한 형태의 성이었다.[72]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목재 건축 전통을 공유했지만, 스페인은 돌이나 진흙 벽돌을 주요 건축 자재로 더 흔하게 사용했다.[74] 8세기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무슬림 침략으로 목재가 부족했던 북아프리카에서 개발된 시멘트 속 자갈인 '타피알'을 사용하는 건축 양식이 도입되었다.[75] 돌 건축은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도 흔해졌지만, 11세기부터 스페인의 기독교 성에서는 주요 건축 자재였으며,[76] 동시에 목재는 여전히 북서부 유럽의 지배적인 건축 자재였다.[73]

A square building of grey stone with narrow vertical slits on the first floor, and wider windows on the second. The top of the castle looks decayed and there is no roof, except over a tower attached to the keep.


역사가들은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에 성이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전쟁이 흔했고 주로 지역 영주들 간에 벌어졌다는 증거로 해석해 왔다.[78] 성은 1066년 노르만 정복 직전 잉글랜드에 도입되었다.[79] 12세기 이전 덴마크에서는 성이 흔하지 않았는데, 이는 노르만 정복 이전 잉글랜드와 비슷했다. 덴마크에 성이 도입된 것은 벤드족 해적의 공격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주로 해안 방어 목적으로 사용되었다.[69] 모트와 베일리는 12세기까지 잉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에서 지배적인 성 형태로 남아 있었다.[80] 동시에, 유럽 본토의 성 건축은 더욱 정교해졌다.[81]

돈전(Donjon, 또는 킵(Keep))[82]은 12세기 성 건축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중앙 탑이 급증했으며, 일반적으로 3m에서 4m 두께의 벽을 가진 사각형 평면이었다. 장식은 로마네스크 건축을 모방했고, 때로는 교회 종탑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한 이중 창문을 포함했다. 성주의 거처였던 돈전은 더 넓어지도록 진화했으며, 디자인의 강조점은 기능적 요구 사항에서 장식적 요구 사항으로 변화하여 영주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이는 때때로 전시 효과를 위해 방어력을 희생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81]

12세기까지 석조 성과 흙, 목재로 지어진 성이 공존했지만,[83] 12세기 후반에는 새로 건설되는 성의 수가 감소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석조 요새의 높은 비용과 목재 및 토공 구조물의 노후화 때문이었으며, 더 내구성 있는 석조 건축이 선호되었다.[84] 석조 건축물로 대체되었지만, 목재와 토공 성도 결코 쓸모없어진 것은 아니었다.[85] 이는 오와인 글린두르의 11세기 목재 성 시카르스가 15세기 초까지 사용되었고 그 구조가 4세기 동안 유지된 사례처럼, 오랜 기간 목재 성이 지속적으로 유지 관리된 사실로 입증된다.[86][87]

아치형 입구 양쪽에 밝은 노란색 돌로 된 두 개의 둥근 타워와 어두운 오렌지색 돌로 된 타워가 있다. 다리는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성 건축에도 변화가 있었다. 12세기 후반까지 성에는 일반적으로 탑이 거의 없었고, 출입구는 방어 기능이 적었다. 큰 돈전은 대개 사각형이었고 화살 구멍이 없었으며, 성의 모양은 지형에 따라 결정되어 불규칙하거나 곡선 형태인 경우가 많았다.[88] 12세기 말 또는 13세기 초에 새로 건설된 성은 다각형 모양에 모서리마다 탑을 두어 성벽에 측면 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탑은 벽에서 돌출되었고 각 층에 화살 구멍(arrowslit)이 있어 궁수들이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89] 이후의 성들은 항상 돈전을 갖지는 않았는데, 이는 성 전체의 디자인이 복잡해지면서 비용이 증가하여 돈전을 생략했기 때문일 수 있다. 더 큰 탑들이 돈전의 거주 공간 기능을 대신했다. 돈전이 있는 경우에도 더 이상 사각형이 아닌 다각형이나 원통형이었다. 출입구는 더욱 강력하게 방어되었으며, 성 입구는 일반적으로 아치형 통로 양쪽에 있는 두 개의 반원형 타워 사이에 위치했고, 하나 이상의 내리닫이 쇠창살문(portcullis)이 설치되었다.[89]

파데르네 성의 알바라나 타워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성에서는 알바라나 타워(Albarrana tower)라고 불리는 분리된 타워를 주변에 사용하는 독특한 특징이 나타났는데, 이는 바다호스 알카사바에서 볼 수 있다. 12세기에 개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측면 사격을 제공했으며, 이동식 나무 다리로 성과 연결되어 타워가 점령당하더라도 나머지 성으로 접근할 수 없게 만들었다.[90]

성의 복잡성과 양식 변화의 원인을 설명하려 할 때, 과거 골동품 연구가들은 십자군 전쟁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했다. 십자군이 사라센과의 전투 및 비잔틴 건축과의 접촉을 통해 요새화 기술을 배웠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출신 건축가 랄리스가 웨일스 남부 성들을 개선했다거나, 제임스 오브 세인트 조지 같은 건축가가 동방 출신이라는 전설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이러한 견해는 의문을 받게 되었다. 전설은 신빙성을 잃었고, 제임스 오브 세인트 조지는 프랑스 생 조르주 데스페랑슈 출신임이 밝혀졌다. 만약 동방의 혁신이 큰 영향을 미쳤다면, 그 영향은 제1차 십자군(1096–1099) 직후인 1100년경부터 나타났어야 하지만, 실제 변화는 거의 100년 후에 두드러졌다.[92] 서유럽에는 둥근 탑이나 두 탑 사이에 입구가 있는 로마 시대 구조물 유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성 건축가들은 이를 알고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영국의 "색슨 해안" 요새가 재사용되었고, 스페인 아빌라의 성벽(1091년 건설)은 로마 건축을 모방했다.[92] 역사가 스마일(R. C. Smail)은 동방 요새가 서방에 미친 영향이 과장되었으며, 12세기 십자군이 비잔틴과 사라센 방어로부터 과학적 설계를 거의 배우지 못했다고 주장했다.[93] 자연 지형을 활용하고 견고한 해자와 성벽을 갖춘 성은 복잡한 과학적 설계 없이도 충분히 방어력을 갖출 수 있었다. 케라크 성이 그 예로, 과학적 설계 요소는 없었지만 거의 난공불락이었기에 1187년 살라딘은 공격 대신 포위를 선택했다.[93]

A stone castle with two high curtain walls, one within the other. They are crenelated and studded with projecting towers, both rectangular and rounded. The castle is on a promontory high above the surrounding landscape.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성 건축에 영향을 미친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11세기 후반과 12세기 동안 구호 기사단, 튜튼 기사단, 템플 기사단 등은 현재 터키 남중부인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정교한 요새 네트워크는 십자군 성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요새들은 돌출 지형을 따른 불규칙한 평면, 여러 겹의 방어벽, 둥글거나 말굽 모양의 탑, 정교하게 다듬은 애슐러 석재 마감, 복잡하게 굽은 입구와 숨겨진 후문, 슬롯형 마시쿨리(machicolation), 궁수를 위한 포대형 창문(embrasured loopholes), 아치형 지하 구조물, 정교한 배수 시설을 갖춘 물탱크 등의 특징을 보였다.[94] 제1차 십자군 이후 세워진 십자군 국가의 초기 성들은 시리아 석공들이 설계하여 로마나 비잔틴 요새와 유사한 사각형 평면에 각 모서리에 사각형 탑이 있는 형태였지만,[96] 제3차 십자군(1189–1192) 이후 동방의 성 건축은 더욱 복잡해졌다. 13세기 초, 기사수도회들은 크라크 데 슈발리에, 마르가트, 벨부아르 요새와 같은 유적지를 건설하며 동심원 방어(concentric defence) 개념을 발전시켰다.[100] 이는 중앙의 돈전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고 여러 겹의 성벽 방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안쪽 벽을 바깥쪽 벽보다 높게 지어 시야를 확보하고, 두 벽 사이 공간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구조였다.[101]

Two cylindrical stone towers flanking a gateway, and behind them two larger cylindrical towers. A path leads up to the gateway and curtain walls are attached to the towers.
에드워드 1세웨일스 북부에 건설한 하를레흐 성 (1280년대 건설)의 디자인은 십자군 전쟁의 경험에 영향을 받았다.


동심원 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예를 들어, 십자군에 참여했던 잉글랜드에드워드 1세는 13세기 후반 웨일스에 성을 건설할 때 동심원 설계를 적극적으로 채택했다.[100][101] 십자군 성의 특징 중 하나인, 탑 측면에 위치하고 두 번 꺾이는 굽은 입구(bent entrance)는 유럽에서는 드물게 나타났다.[100] 발트 십자군은 프로이센리보니아 지역에 돌과 벽돌 요새 건축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3세기와 14세기 초 이 지역에는 중앙 안뜰을 중심으로 사각형 평면의 성들이 표준적으로 나타났다.[102] 또한, 십자군 전쟁은 서양 건축에 마시쿨리(machicolation, 돌출구) 도입을 이끌었다. 이전에는 나무 갤러리를 사용했지만, 돌로 만든 마시쿨리는 동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십자군 도착 훨씬 전인 8세기 전반 시리아에서 이미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03] 에드워드 1세의 성 건설 계획 이후 유럽에서 널리 채택된 화살 쏘는 구멍(arrowslit) 역시 동방의 성, 특히 발트 지역 성들에서 먼저 흔하게 사용되었다.[33]

스페인에서는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성 건설이 가장 활발했으며, 주로 기독교와 이슬람 영토 사이의 분쟁 지역에 집중되었다. 두 세력 간의 상호 작용은 건축 아이디어 교환으로 이어져, 스페인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건축의 특징인 분리된 타워(알바라나 타워)를 채택하기도 했다. 스페인의 레콩키스타는 1492년에 완료되었다.[90]

코르빈 성(트란실바니아) (1446년에서 1480년 사이에 건설)은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였다.


14세기에는 화약으로 작동하는 화포가 1320년대 유럽에 도입되어 빠르게 확산되었다. 초기 권총은 1380년대에 기록되었다.[107] 성들은 19.6kg에서 22kg 사이의 작은 포병 무기를 탑에서 발사할 수 있도록 개조되었다. 이 총들은 너무 무거워 사람이 들고 쏘기 어려웠기 때문에, 총구 아래에 수평으로 놓인 나무(timber)에 총 끝의 고리를 걸어 반동을 흡수하는 방식의 포구(gunport)가 개발되었다. 이 포구는 아래쪽에는 총을 넣는 둥근 구멍이 있고 위쪽에는 조준을 위한 좁은 틈새가 있는 열쇠 구멍 모양이었으며, 이집트,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스페인 등 유럽 전역에서 발견된다.[108] 총을 방어에 사용하면서 프랑스의 샤토 드 햄과 같은 포병 성(artillery castle)이 등장했으며, 이는 마시쿨리, 높은 탑, 치성(crenellation)과 같은 이전 시대의 특징을 없애는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109][110]

15세기에는 더 큰 대포가 개발되어 트레뷰셋(trebuchet)과 같은 전통적인 공성 무기를 대체하게 되었다. 대포는 더 긴 사거리와 강력한 파괴력을 가졌으며, 1450년대에는 주요 공성 무기로 자리 잡았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서 그 효과를 입증했다.[111] 이에 대한 대응으로 성벽은 더 두꺼워졌고, 평평한 면보다 포탄을 굴절시키기 쉬운 둥근 탑이 선호되었다. 기존 성들은 성벽 뒤에 흙둑을 쌓아 충격을 흡수하거나,[112] 탑 상부를 허물고 잔해로 채워 총을 발사할 수 있는 평평한 표면을 만들기도 했다. 다만 이 방식은 성벽 높이를 낮춰 사다리 공격에 취약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더 일반적인 방법은 성의 방어선 너머에 흙이나 돌로 보루(bulwark)를 쌓아 포를 배치하는 것이었다.[113]

15세기 초가 되면서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성 건설 속도가 감소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성 건축이 두각을 나타내며 중세 요새화 분야를 이끌었다.[105] 유럽 전역, 특히 발트해 연안, 독일, 스코틀랜드에서는 16세기까지도 성이 계속 건설되었다.[106] 그러나 화약 무기의 발달로 전통적인 성의 군사적 중요성은 점차 감소하게 되었다.

2. 3. 쇠퇴와 변화 (16세기 이후)



15세기 이후 화약을 사용하는 화포(대포)와 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전통적인 성의 군사적 가치는 점차 줄어들었다.[111] 이전 시대의 높은 성벽과 탑은 강력해진 대포 공격에 취약했으며, 성을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이 모색되었다. 초기에는 19.6kg에서 22kg 사이의 작은 포병 무기를 성의 탑에서 발사할 수 있도록 개조하기도 했다.[107][108]

이에 대한 대응으로 성벽을 더 두껍게 만들거나, 포탄을 튕겨내기 유리한 둥근 형태의 을 선호하게 되었다.[112] 기존 성의 경우, 성벽 뒤에 흙을 쌓아 충격을 흡수하거나[112], 총을 배치하기 위해 탑의 윗부분을 허물고 내부를 채워 평평한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113] 또한 성의 방어선을 보강하기 위해 성 외부에 보루(bastion)라는 새로운 방어 시설을 흙이나 돌로 쌓아 화포를 배치하기도 했다.[113]

이탈리아의 코페르티노 성에서 볼 수 있는 각진 보루. 이러한 혁신은 성의 군사적 역할을 대체하는 새로운 요새 시스템의 시작을 알렸다.


결정적인 변화는 1500년경 이탈리아에서 각진 형태의 보루가 개발되면서 시작되었다.[114] 이는 포병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요새 시스템인 성형요새(star fort 또는 Trace Italienne)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점차 성의 군사적 방어 기능을 대체하게 되었다.[9]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성을 짓는 엘리트들은 실용적인 방어 기능과 전통적인 성의 미적 가치 및 권위 상징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고, 점차 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115] 결과적으로 16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새로운 성의 건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모든 성이 즉시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 성은 지방 행정 중심지나 법원으로 사용되었고, 많은 성들이 귀족 가문의 세습 재산으로 남았다. 대표적인 예로 11세기에 지어져 현재까지 영국 군주의 거처로 사용되는 윈저 성이 있다.[125]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스페인과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이 중세 유럽 양식의 성(포르탈레자 오사마 등)이나 요새화된 거주지(롱게유 요새, 센네빌 요새 등)를 건설하기도 했다.[119][120][121][122][123][124] 한편,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등지에서는 14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타워 하우스라는 방어 기능을 갖춘 소규모 거주용 탑이 유행하기도 했다.[126][127]

19세기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지어진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 실제 군사적 기능보다는 중세 성의 이상적인 모습을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멕시코 시티의 차풀테펙 성. 19세기에 지어져 제2 멕시코 제국 황제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17세기 이후, 엘리트 계층은 점차 성을 떠나 방어 기능보다는 거주 편의성과 화려함을 강조한 컨트리 하우스(시골 저택)를 선호하게 되었다.[128]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의 웅장한 컨트리 하우스가 사회적 의미에서 '그 시대의 성'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28] 물론 잉글랜드 내전 (1641–1651)과 같은 분쟁 시기에는 일부 성들이 다시 요새화되어 사용되기도 했으나, 전쟁 이후에는 의도적으로 파괴되거나(슬라이트) 방치되는 경우가 많았다.[129] 흥미롭게도, 일부 컨트리 하우스는 실제 방어 목적 없이 포탑이나 작은 창문 등을 추가하여 성과 같은 외관을 모방하기도 했다(예: 부바크라 성).[130]

19세기에는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중세 시대와 기사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딕 부흥 양식이 유행했다. 이 시기에는 실제 중세 성을 모방한 '부흥 성' 또는 '모의 성'이 다수 건설되었다.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132], 멕시코의 차풀테펙 성[131]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 성들은 중세 성의 외관을 빌려왔을 뿐, 내부는 당시의 생활 기준에 맞춰 설계되었다.[134] 또한, 귀족들의 정원에는 일부러 폐허처럼 보이게 만든 인공 폐허나 특별한 기능 없이 장식용으로 지은 폴리 건축물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이 역시 성의 건축 요소를 차용한 것이었다.[135]

현대에 이르러 성은 본래의 군사적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중요한 역사적 유산이자 문화적 상징으로 남아 많은 곳에서 박물관, 관광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놀이터나 놀이공원 등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 성 형태의 놀이 시설로도 찾아볼 수 있다.

2. 4. 한국의 성



한반도의 성은 고유한 형식인 산성과 중국의 영향을 받은 도시 성벽 형태의 읍성이라는 두 가지 주요 형식이 있었으며,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읍성 중심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한반도의 산이 많은 지형적 특성상 완전한 평지 읍성보다는 산성과 절충된 형태의 성곽이 많이 나타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포위를 견뎌낸 연안성이나, 일본군의 공격을 한 차례 물리쳤던 진주성(진주성 전투) 등이 이러한 절충 형식의 대표적인 예이다. 현재 대한민국 수원시에 위치한 화성은 조선 후기 성곽 건축의 독자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구조물로 평가받는다.

고대 일본에서는 '성(城)'을 '키'라고 읽었으며, '책(柵)'이라는 글자도 함께 사용되었다. '책'은 주로 야마토 왕권이 도호쿠 지방에 설치했던 행정 및 방어 시설(성책)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반면 '성(키)'은 미즈키오노성처럼 서일본 지역에 분포했던 고대 산성이나 방벽을 의미했다. 이러한 고대 산성들은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야마토 왕권이 신라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이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특히 멸망한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유민들의 기술 지도를 받아 만들어졌으며, 판축 기법으로 쌓은 토루 외곽 성벽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이 고대 성곽 축조 기술은 이후 중세 시대의 성곽 기술로는 계승되지 않았다.[198]

이노우에 히데오의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원시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총 1,806개의 성곽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문헌 기록과 유적이 일치하여 확인된 것은 381개로, 전체의 약 21%에 해당한다.[205]

한편, 임진왜란정유재란 시기에는 한반도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의해 일본식 성곽이 다수 축조되었는데, 이를 '왜성(倭城)'이라고 부른다. 왜성은 일본 본토의 성과 유사하게 전체를 돌로 쌓는 방식(총석축, 総石垣|소이시가키일본어)으로 지어졌으며, 망루( 櫓|야구라일본어 ), 성문, 담장 등을 갖추었다. 일부 왜성에는 천수가 세워지기도 했다.

3. 구조

성은 일반적으로 방어와 거주라는 복합적인 목적을 위해 여러 구조물로 설계된다. 시대와 지역, 축조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이지만, 핵심적인 구조 요소들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 모트(Motte)와 베일리(Bailey) ===

클러프 성(Clough Castle)의 모트(왼쪽 언덕)와 베일리(오른쪽)


윈저 성의 모트(중앙 언덕 위의 킵)와 좌우의 베일리


중세 초기의 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는 모트와 베일리(Motte-and-bailey영어) 방식이다.

  • '''모트'''(Motte영어)는 성의 중심부 역할을 하는 인공적인 작은 언덕이다. 평지나 구릉 지역에서 주변의 흙을 파내 해자를 만들고, 그 파낸 흙을 쌓아 올리거나 자연적인 언덕을 이용하여 만든다. 모트 위에는 처음에는 목조 감시 초소가, 이후에는 석조 킵(Keep)이라 불리는 주탑이 세워져 성 방어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203] 일반적으로 하나의 성에는 하나의 모트가 있지만, 링컨 성(Lincoln Castle)처럼 두 개의 모트가 있는 경우도 있다.
  • '''베일리'''(Bailey영어)는 모트 주변에 해자, 울타리, 성벽 등으로 둘러싸인 방어 구역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영주의 가족이나 가신들의 거주 시설, 병사들의 숙소, 마구간, 무기나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 작업장, 우물이나 저수조, 예배당 등 성 운영에 필요한 다양한 시설이 들어섰다.[203] 하나의 성에 여러 개의 베일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방어 구획을 나누거나 시설의 기능을 분리하기 위함이었다.[203] 베일리는 '중정'(Courtyards영어)이라고도 불린다. 모트 없이 베일리만 독립적인 방어 구조로 존재하기도 하는데, 이를 환상 요새(Ringwork)라고 한다.[23]


=== 킵(Keep) / 돈존(Donjon) ===

'''킵'''(Keep영어) 또는 프랑스어 발음인 '''돈존'''(Donjon프랑스어)은 중세 유럽 성의 중심이 되는 형태의 건축물로, 주로 모트 정상에 세워졌다. 한국어로는 '''주탑'''(主塔) 등으로 번역된다. 초기에는 목조 탑이었으나 11세기에서 12세기경부터 점차 견고한 석조 건물로 대체되었다.[203]

킵은 영주의 거처이자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최후의 방어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킵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 '''셸 킵'''(Shell keep영어): 초기에 나타난 형태로, 다각형의 석조 외벽으로 둘러싸인 구조이다. --
  • '''홀 킵'''(Hall keep영어): 2~3층 정도의 비교적 낮은 건물 형태의 킵이다.
  • '''타워 킵'''(Tower keep영어): 3층 이상의 높은 탑 형태의 킵으로, 가장 발전된 형태이다.[203]


킵의 평면 형태도 다양하게 발전했다. 초기에는 사각형이 일반적이었으나, 11세기 후반부터는 원형이나 원형에 작은 탑을 덧붙인 형태, 12세기 중반에는 네 잎 클로버 모양(네 잎형), 12세기 후반 이후에는 다각형 형태 등이 나타났다.[203]
에탕프 성(Château d'Étampes)의 네 잎형 타워 킵
12세기에는 특히 중앙 타워로서의 킵이 중요해졌으며, 벽 두께가 3m에서 4m에 달하는 정사각형 평면의 킵이 유행했다. 이 시기 킵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아 장식성이 강화되었고, 영주의 권력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커졌다.

15세기 이후에는 거주 공간을 포함한 소규모 성곽 형태인 '''타워 하우스'''(Tower house영어)도 등장했다.[203]

=== 성벽(Enceinte / Curtain Wall)과 탑 ===

성벽은 성 전체 또는 베일리를 둘러싸는 주된 방어 구조물이다. 성벽은 단순히 벽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벽과 함께 설치된 여러 방어 시설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를 통칭하여 '''앙상트'''(Enceinte프랑스어)라고도 부른다. 성벽의 주요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다.

  • '''막벽'''(커튼 월, Curtain Wall영어): 성의 주요 구역을 둘러싸는 기본적인 벽체이다. 초기 성벽은 상부에 병사들이 이동하고 방어 활동을 할 수 있는 보도와 여장(Crenellation, 성벽 위에서 몸을 숨기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든 요철 모양 구조), 그리고 흉벽(Battlement, 여장의 돌출된 부분)을 갖추었다. 벽에는 종종 활이나 화살을 쏘기 위한 좁은 틈인 '''사안'''(射眼, 화살 구멍)이 설치되었다.[203]
    여장(凹部)이 있는 흉벽
    --
  • '''성벽탑'''(측방탑, Defensive Tower영어): 공성전 기술이 발달하면서 성벽 자체만으로는 방어가 어려워지자, 13세기경부터 성벽 곳곳에 벽면에서 돌출된 탑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 탑들은 주로 반원형이나 사각형 형태였으며, 탑에 설치된 화살 구멍을 통해 성벽에 접근하는 적에게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사격할 수 있었다.[201] 탑의 간격은 점차 좁아져 방어 효율을 높였다. 방어 목적 외에도, 전술적으로 유리한 지점에 설치된 작은 감시탑인 '''포탑'''(Turret영어)이나 성벽 모서리 등에 돌출된 작은 망루인 '''돌출 망루'''(Bartizan영어), 그리고 거주 공간을 제공하는 거주탑(Lodging Tower영어) 등 다양한 목적의 탑들이 세워졌다.[201] --
    돌출 망루(Bartizan)
  • '''경사면'''(Talus영어 또는 Batter영어): 성벽 하부에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든 경사면이다. 이는 적들이 땅굴을 파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어렵게 하고, 공성탑과 같은 공성 무기의 접근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성벽 자체의 두께를 보강하여 대포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203]
  • '''누각'''(Hoardings영어): 성벽이나 탑의 상부에 설치된 지붕이 있는 목조 구조물이다. 방어자들이 안전하게 아래쪽의 적을 공격(돌이나 끓는 물 투하 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후 석조 구조물인 마키콜리(Machicolation)로 발전하기도 했다.


13세기 십자군 전쟁 이후에는 크락 데 슈발리에와 같이 여러 겹의 성벽을 동심원 형태로 배치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동심원 성곽(Concentric castle영어)이 등장했다. 내부 성벽이 외부 성벽보다 높게 지어져 안쪽에서도 바깥쪽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고, 외벽이 뚫리더라도 내벽과의 사이 공간(킬링 그라운드)에서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동심원 구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 성문(Gateway)과 부속 방어 시설 ===

'''성문'''(Gateway영어)은 성으로 출입하는 통로이자 방어의 취약점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시설이다. 성문은 단순히 문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어 시설과 결합되었다.

  • '''루문'''(게이트 하우스, Gatehouse영어): 성문의 방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문과 방어탑, 주거 공간 등을 결합한 복합적인 건물이다. 13세기 이후 발달했으며, 종종 두 개의 원통형 탑 사이에 사각형 건물이 들어서는 형태를 보였다.[201] 루문 자체로 작은 요새 역할을 수행하며 성의 주된 방어 거점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 '''방어 시설**: 성문에는 일반적으로 위아래로 여닫는 '''격자문'''(Portcullis영어), 해자 위에 설치되어 들어 올릴 수 있는 '''도개교'''(Drawbridge영어) 등이 설치되어 적의 접근을 차단했다.
  • '''바비칸'''(Barbican영어): 성문 바깥쪽에 추가로 설치하는 작은 요새화된 방어 시설이다. 성문으로 향하는 길을 구불구불하게 만들거나 추가적인 방어 거점을 제공하여 성문 자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십자군 성에서는 정문을 탑 측면에 내고 통로를 여러 번 꺾어지게 만들어 적이 성벽에 도달하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구조(구부러진 입구, Bent entrance영어)가 흔했지만, 유럽 본토에서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4. 사회적 역할

성은 단순히 군사적 방어 시설일 뿐만 아니라, 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행정의 중심지였다.[150] 영주는 성에서 법정을 열고 주변 지역을 통제했으며,[150] 이를 통해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성공적인 영주는 성에서 정기적으로 가신이나 지역 유력자들과 만나며 관계를 유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150] 규모가 큰 영지의 경우, 영주가 모든 지역을 직접 방문하기 어려워 대리인을 임명하여 성을 관리하게 하기도 했다.[150] 주요한 성은 위정자나 지휘관의 거처로서 정치정보의 거점 역할도 수행했다.[196]

성의 규모와 외형은 영주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특히 12세기 이후 성 건축에서는 기능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풍경 속에 군주의 권력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건축가들은 기사도 정신을 상징하는 모티프를 사용했으며,[154] 후대에는 낭만주의 영향으로 성벽과 같은 요소를 사용하여 과거의 권위를 나타내려 했다.[154] 성은 대성당과 비교될 만큼 건축적 자부심의 대상이었고,[154] 때로는 정원을 조성하여 장식적인 요소를 더하기도 했다.[154] 군주가 총안 설치를 허가하는 것은 영주의 지위를 인정하고 군주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증표였다.[155][156] 후대에 많은 저택들이 실제 요새 기능이 없어도 이름에 '성'을 붙인 것은 이러한 권력 상징성을 이용하려는 의도였다.[14]

성은 영주와 그의 가족, 가신, 병사, 하인들이 함께 생활하는 복합적인 거주 공간이었다. 성의 중심 건물인 돈전은 평상시 영주와 손님들이 머무는 곳이었으며,[28] 때로는 영주의 부인이 별도의 거처를 관리하기도 했다.[30] 영주의 생활을 돕기 위해 많은 하인들이 있었고, 시종장이 가사를 총괄했으며 재무 담당자가 재산을 관리했다.[151] 성 안의 주방은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152] 영주가 자리를 비울 때는 성을 유지 관리하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아 조용한 공간이 되기도 했다.[153] 중세 성에서 여성은 주로 가사를 돌보거나 영주의 부재 시 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160][161] 여성은 지참금으로 받은 재산을 관리했으며,[161] 때로는 성의 건축이나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162]

성은 연회, 축제, 토너먼트 등 다양한 사교 활동이 이루어지는 중심지였다.[154] 영주는 성에서 정기적으로 법정을 열어 가신들과 교류했다.[150] 또한, 궁정 연애와 같은 귀족 문화가 성을 배경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이는 때때로 기사귀부인의 증표를 달고 싸우는 토너먼트와 같은 공식적인 행사로 표현되거나, 은밀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157]

5. 문화



17세기 이후 엘리트 계층이 성에서 시골 저택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경향이 나타났지만, 성이 완전히 그 가치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영국 남북 전쟁(1641~1651)과 같은 이후의 분쟁에서 일부 성이 다시 요새화되기도 했으나, 점차 군사적 기능은 약화되었다. 한편, 중세 시대와 기사도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심이 커지면서 고딕 부흥 건축의 일환으로 성을 모방한 건축물(부흥 성, 모의 성)이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건물들은 외관상 성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내부는 현대적인 생활 기준에 맞게 설계되었다. 또한, 귀족들의 정원에는 폐허처럼 보이도록 인공적으로 만든 구조물(인공 유적, 폴리)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이는 군사적 목적 없이 순전히 장식적인 요소였다.

현대에 들어 성은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많은 성들이 과거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적이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 및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다만, 성을 재건하거나 수리할 때 역사적 원형을 어디까지 복원하고 관광객의 편의를 얼마나 고려할 것인지는 지속적인 과제로 남는다.

성은 오늘날 중요한 관광 자원으로 활용된다. 프랑스의 루아르 고성 순례나 독일의 로맨틱 가도는 성을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관광 코스이다. 일본에서는 재단법인 일본성곽협회가 4월 6일을 '성의 날'로 지정하여[206] 벚꽃 개화 시기에 맞춰 각지의 성에서 무료 개방 등 행사를 열기도 한다. 히메지시 역시 자체적으로 4월 6일을 '성의 날'로 정하고 히메지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한다.[207] 아타미성처럼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현대에 관광 목적으로 새롭게 지어진 성도 있다.

여러 국가와 단체에서는 역사적 가치, 보존 상태, 인기 등을 기준으로 '명성(名城)'을 선정하여 발표하기도 한다.

선정 주체선정 명칭주요 사례
일본성곽협회일본 100명성 (2006), 유럽 100명성 (2010), 속 일본 100명성 (2017)-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 7대 명성 (2011)-
포르투갈포르투갈의 7대 불가사의기마랑이스 성, 오비두스 성
잉글리시 헤리티지 (영국)TOP 10 Castles도버 성, 틴타젤 성 등
내셔널 트러스트 (영국)Top 10 Castles보디엄 성, 차크 성, 코프 성 등



성이나 성터는 박물관, 정부 시설, 호텔 등으로 재이용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바스티유 감옥처럼 교도소로 사용된 역사도 있으며, 일본의 오즈성[211]이나 영국의 옥스퍼드 성 등은 호텔로 활용되고 있다.

성은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활용된다. 중세의 베리 공의 호화로운 시도서와 같은 회화 작품에서부터 현대의 영화, 소설, 게임 등에 이르기까지 성은 매력적인 배경이나 영감의 원천이 된다. 영화 촬영 장소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해변에서 모래성을 만드는 놀이[212] 역시 성과 관련된 대중문화의 하나이지만, 필리핀의 보라카이 섬[213]이나 이탈리아의 에라클레아[214] 등 일부 지역에서는 환경 보호를 이유로 모래성 만들기를 금지하고 벌금을 부과하기도 한다. 놀이터나 놀이공원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 성 형태의 놀이기구를 흔히 볼 수 있다.

아타미 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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